[미국 이민기] 이민 후 부부 관계의 변화: 서로의 가장 든든한 페이스메이커가 되는 법

한국에 있을 때는 남편과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줄 몰랐다.
각자의 일이 있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고, 아이를 키우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았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의 하루를 자세히 묻지 못하고 지나가는 날이 많았다. 피곤해서 먼저 잠들기도 하고, 주말이면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작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그냥 결혼 생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우리의 생활은 조금 달라졌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익숙하게 드나들던 곳도 없고, 작은 일 하나를 처리하려 해도 새로 알아봐야 하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편을 더 자주 찾게 되었다.
“여보, 이거 어떻게 해야 돼?”
“이거 전화 좀 해줄 수 있어?”
“나 혼자 가기 좀 그런데 같이 가줄래?”
한국에서는 혼자서도 척척 해냈을 일들이 미국에서는 둘이 해야 마음이 놓일 때가 많았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갔다.
낯선 곳에서는 결국 우리 둘이었다
이민을 오면 새로운 집과 새로운 환경만 얻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익숙한 관계들이 멀어진다.
한국에 있을 때는 힘든 일이 생기면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 수도 있었고,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시차도 있고, 서로의 일상도 달라져 예전처럼 쉽게 만나고 기대기가 어렵다.
결국 하루가 끝나고 가장 가까이 남아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집 문제도, 아이 학교 문제도, 병원 예약도, 영어로 설명해야 하는 일들도 하나씩 함께 해결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일에도 긴장했고, 해결하고 나면 둘이서 괜히 뿌듯해하기도 했다.
“우리 오늘 이것도 해냈네.”
그런 날들이 쌓이면서 남편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 함께 살아서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낯선 세상에서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을 와서 부부 사이가 무조건 좋아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서로를 더 가까이서 바라보게 된 시간이 되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이렇게 많아질 줄이야
미국 생활을 하면서 참 좋다고 느끼는 것 중 하나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물론 미국의 모든 가정이 가족 중심으로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주말이면 “오늘은 어디 갈까?” 하고 고민하고, 가까운 공원에 가거나 장을 보러 나간다. 특별한 계획 없이 드라이브를 하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르기도 하고,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도 참 좋다.
한국에서는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일들을 이곳에서는 조금 더 여유롭게 해보게 된다. 아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하고, 남편이 옆에서 장난을 치고, 나는 저녁 준비를 하다가 둘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런 평범한 순간들.
예전에는 특별한 날이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이런 아무 일 없는 하루가 참 좋다.
우리가 이민을 선택하면서 바랐던 삶도 어쩌면 이런 모습이었는지 모르겠다. 더 많이 벌고, 더 좋은 곳에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함께 웃으며 보내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그만큼 소중했다.
그런데, 너무 붙어 있으니 또 문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우리 부부가 늘 다정하게만 지내는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더 잘 보인다.
남편의 작은 습관이 괜히 거슬리는 날도 있고, 별뜻 없이 한 말에 내가 예민하게 반응할 때도 있다.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 종일 함께 있다 보면 서로의 기분이 너무 잘 보여서, 상대가 조금만 예민해도 나까지 영향을 받는다.
“아니, 그냥 물어본 건데 왜 그렇게 말해?”
“나 지금 좀 피곤하다고.”
이런 대화가 오가는 날도 있다.
한국에서는 각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생활의 많은 부분을 함께하다 보니 그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사는데 왜 작은 일에 짜증이 날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매 순간 붙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가족이 좋아도 혼자 있고 싶은 날이 있고, 남편이 좋아도 아무 말 없이 쉬고 싶은 시간이 있다.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야 다시 다정해진다
요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서로의 숨구멍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남편에게는 남편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나에게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운동을 하거나, 혼자 커피를 마시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말이다.
꼭 어디 멀리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 오늘은 혼자 좀 쉬고 싶어.”
이런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함께하지 않는 시간이 서운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안다. 서로에게 조금의 여유를 주는 것이 오히려 다시 다정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남편이 내 모든 외로움을 해결해 줄 수는 없고, 나 역시 남편의 모든 스트레스를 받아줄 수는 없다. 각자의 삶이 건강해야 부부의 삶도 건강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의 페이스메이커
이민 생활을 하다 보면 한 사람이 조금 더 잘 적응할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이 힘들어할 때도 있다.
어떤 날은 내가 씩씩하게 일을 처리하지만, 또 어떤 날은 영어 한마디가 잘 나오지 않아 속상하고 집에 돌아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남편도 분명 그런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옆에서 속도를 맞춰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처럼 말이다.
상대가 지쳤다고 대신 뛰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 천천히 가자고 말해줄 수는 있다. 힘든 구간을 지날 때 옆에서 함께 걸어줄 수 있고, 다시 힘이 날 때까지 기다려줄 수도 있다.
“괜찮아, 천천히 해.”
“우리 같이 해보자.”
이런 말들이 낯선 곳에서는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
늘 두 사람이 똑같이 강할 필요는 없다. 내가 힘든 날에는 남편이 조금 더 힘을 내주고, 남편이 지친 날에는 내가 옆에서 챙겨주면 된다.
누가 더 잘하고 있는지 따지는 것보다,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고맙다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된다
이민을 오고 나서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할 일이 참 많아졌다.
운전을 해주는 일, 아이를 챙기는 일, 집안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 내가 어려워하는 일을 대신 알아봐 주는 일까지.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들이 이곳에서는 더 크게 느껴진다.
물론 매번 다정하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쁘고 피곤하면 그냥 지나칠 때도 많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여보, 오늘 고생했어.”
“고마워. 덕분에 편했어.”
별것 아닌 말인데도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부부 사이에는 대단한 선물보다 내가 한 일을 상대가 알아주고 있다는 느낌이 더 필요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바라던 삶을 잊지 않으려고
이민 생활이 늘 여유롭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경제적인 문제도 생각해야 하고, 아이의 미래도 고민해야 한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운 날도 있고, 문득 내가 왜 이 낯선 곳에서 이렇게 애쓰고 있나 싶은 날도 있다.
그럴 때면 우리가 처음 이민을 결심했던 이유를 떠올려본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이곳에 왔다. 그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이 꼭 거창한 성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우리 부부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끔은 바쁜 일들을 잠시 내려놓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주말에 가까운 곳으로 나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이와 웃고,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것.
그런 시간이 쌓여서 결국 우리 가족의 미국 생활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민을 와서 다시 배우는 부부라는 관계
결혼을 오래 했다고 해서 서로를 다 아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익숙한 환경에서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새로운 곳에서는 드러나고, 몰랐던 고마움도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더 가까워지고, 때로는 너무 가까워서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우리 부부에게는 서로를 다시 알아가는 시간이 되고 있다.
나는 남편에게 완벽한 아내가 아니고, 남편도 늘 완벽한 남편일 수는 없다. 서로 예민한 날도 있고, 말이 안 통하는 날도 있고, 괜히 서운한 날도 있다.
그래도 하루가 끝나면 결국 같은 집으로 돌아와 함께 밥을 먹고, 아이 이야기를 하고,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할지 의논한다.
그 평범한 일상이 참 든든하다.
이민이라는 긴 길을 누가 대신 걸어줄 수는 없지만, 옆에서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좋은 날만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낯선 일을 만나고, 가끔은 다투고, 서로에게 서운한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앞서가거나 뒤처지지 않고, 서로의 속도를 살피며 함께 가고 싶다.
“여보, 우리 오늘도 잘해보자.”
그렇게 말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민을 와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부부가 함께 산다는 것의 가장 큰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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